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형주 공방전 (문단 편집) === 남군 공방전 === >조인은 행(行)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임명되어 강릉(江陵)에 남아 주둔하며 오장(吳將) 주유(周瑜)를 막았다. 주유는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고 전봉(前鋒) 수천 명이 처음으로 당도했다. >---- >『삼국지』 「조인전」 >유비는 주유 등과 함께 힘을 합쳐 추격했다. 조조는 조인 등을 남겨 강릉(江陵)을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곧장 북쪽으로 달아났다. > >주유와 정보는 또 남군으로 진군하여 조인과 서로 대치하였는데, 각군은 대강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 >「주유전」 >선주는 오군(吳軍)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공의 군을) 추격해 남군(南郡)에 이르렀다. >---- >「선주전」 [[적벽대전]] 이후, 조조는 조인을 강릉에 남겨두고 퇴각한다. 그리고 주유와 유비의 군대가 남군으로 진군하여 조인과 대치하는데 아직 장강을 건너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에 감녕은 주유를 수행해 오림(烏林)에서 조조를 대항하여 무찔렀다. 남군에서는 조인을 공격했지만, 공략시키지는 못했다. 감녕은 먼저 곧장 이릉으로 진군하여 취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가서 그 성을 얻었으며, 들어가서는 고수했다. >---- >「감녕전」 >이해, 또 주유와 노숙 , 정보 등이 서쪽으로 오림(烏林)에서 조공을 격파하고, 남군에서 조인을 포위했다. 익주의 장군 습숙(襲肅)이 군대를 들어 내부(來附)하니, 주유가 표를 올려 습숙의 병사를 여몽에게 더해주라고 했는데, 여몽은 습숙이 담력이 있어 쓸 만하다고 크게 칭하고 또 귀화를 사모해 멀리서 내부해 왔는데 의리상 마땅히 늘려주었으면 늘려주지,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손권이 그 말을 칭찬하며, 습숙의 병사를 돌려주었다. > >주유가 감녕을 시켜 이릉(夷陵)을 앞서 점거하게 하자, 조인은 군사를 나눠 감면을 공격하니, 감녕은 곤궁하고 위급해져 사자를 보내 구원을 청하게 했다. 여러 장수들이 병사가 적어 (이 병사를) 족히 (구원하기엔) 나눌 수 없다고 하니, 여몽이 주유와 정보에게 말하길 > >"능공적(凌公績; 능통凌統의 자가 공적公績입니다.)을 남기고 저와 당신들이 가면, 위급한 포위를 푸는 것은 세력상 또한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니, 제가 보장컨대 능통은 능히 10일은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 >라 했다. 또 주유에게 병사 3백인을 나눠 파견해 땔나무로 험한 길을 끊어버리면, 적이 패주할 때 적의 군마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주유가 이 말을 따랐다. > >군대가 이릉에 도착하자, 그날로 교전이 벌어졌는데, 죽인 자가 절반이 넘으니, 적이 밤에 도망쳤다. 가다가 땔나무에 막힌 길을 만나니 기병들은 모두 말을 버리고 걸어서 달아났다. 병사들이 추격하여 말 3백 필을 얻었고, 배에 싣고 돌아왔다. 이에 장수와 병사의 형세가 절로 배가 되었고, 이에 강을 건너 둔영을 세우고 적과 서로 공격했다. >---- >「여몽전」 >병사들이 아직 싸움을 하기도 전에 주유는 감녕을 보내 공격하여 포위당했다. 감녕은 주유에게 위급함을 알렸다. 주유는 여몽의 계획을 사용하여 능통을 남겨 그 뒤를 지키도록 하고, 자신은 여몽과 함께 감녕을 구하러 갔다. > >「주유전」 이때 익주의 습숙이 와서 손권에게 귀부한다. 주유가 손권에게 표를 올려 습숙의 군대를 여몽에게 더해주라 하나 여몽은 사양하고 손권이 여몽을 칭찬하며 습숙에게 군대를 돌려주었다. 주유는 감녕의 계책을 써서 이릉을 먼저 점거한다. 이에 조인은 군사를 나눠 이릉을 공격하고, 감녕은 주유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여러 장수들이 군사가 부족하여 나누기 어렵다고 했으나, 여몽은 능통이라면 10일은 충분히 지킬 수 있다 말하고 주유는 이 조언을 따른다. 이릉의 교전에서 주유군이 승리하고 마침내 강을 건너 적과 서로 공격했다. >감녕의 포위가 풀린 후, 주유는 강을 건너 북쪽 해안에 주둔하고 조인과 결전할 날을 정했다. 주유는 직접 말을 타고 싸움을 지휘하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오른쪽 겨드랑이를 맞아 상처가 대단히 심했으므로 곧 바로 돌아왔다. 후에 조인은 주유가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주유는 직접 일어나서 군영을 시찰하고 관리와 병사들을 격려했다. 조인은 이 때문에 후퇴했다. >---- >「주유전」 >주유는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고 전봉(前鋒) 수천 명이 처음으로 당도했다. 조인은 성에 올라 이를 보고 3백 명을 뽑고는, 부곡장(部曲將) 우금(牛金)을 보내 거꾸로 싸움을 걸게 했다. 적이 많고 우금(牛金)의 군사가 적었으므로 마침내 포위되었다. > >장사(長史) 진교(陳矯)가 함께 성 위에 있었는데 우금 등이 거의 몰살되려는 것을 보고 좌우(左右-주변사람들)가 모두 안색을 잃었다. 조인이 의기(意氣)로 매우 분노해 좌우에 일러 말을 가져오게 하니 진교 등이 함께 조인을 말리며 말했다, > >“적의 군사가 흥성하니 당해낼 수 없습니다. 설령 수백 명을 버린다 한들 큰 손해가 아닌데 어찌 장군께서 몸소 가려 하십니까!” > >조인이 응낙하지 않고 마침내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르고는 휘하의 장사(壯士) 수십 기를 거느리고 성을 나섰다. 적과 백여 보 떨어진 곳의 해자(溝)에 접근했다. 진교 등은 조인이 응당 해자 가에 머물며 우금을 돕는 형세를 취할 것이라 여겼으나 조인은 해자를 뛰어넘어 곧바로 전진해 적의 포위망 안으로 돌진해 들어갔고 이에 우금 등이 풀려날 수 있었다. 남은 군사들이 모두 빠져나오지 못했으므로 조인이 다시 돌아가 돌진해 우금의 군사를 벗어나게 하고 여러 명을 잃었으나 적이 이내 물러났다. > >진교 등은 당초 조인이 나가는 것을 보고 모두 두려워했는데 조인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자 감탄하며 말했다, > >“장군은 실로 천인(天人)이십니다!” > >삼군(三軍)이 그 용맹에 감복했다. >---- >「조인전」 이어지는 전투에서 주유가 부상을 당하고 조인은 수십 기를 거느리고 우금을 구원하는 등 혈투가 펼쳐진다. >오록吳錄에서 이르길 : 유비가 주유에게 이르길 : > >“조인이 강릉성을 지키는데, 성 안에 양식이 많아, 괴로운 재앙이 되기에 충분하오. 만약 장익덕이 천 명을 거느리며 경을 따르고, 경이 2천 명을 나눠 나에게 추가해줘, 서로 도우며 하수(夏水)로부터 들어가서 조인의 후미를 끊으면, 조인은 내가 들어간 것을 듣고 필시 달아날 것이오.” > >주유가 2천 명을 그에게 더해줬다. >---- >「주유전」, 배송지의 주석 이 때 유비는 주유로부터 2000명의 군사를 받아 하수로 들어가 조인의 후미를 끊고자 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남아있지 않다. >태조를 수행해 형주(荊州)를 정벌했는데, 별도로 번(樊)에 주둔하여 중려(中廬-형주 남군 중려현), 임저(臨沮-남군 임저현), 의성(宜城-남군 의성현)의 적(賊)을 토벌했다. 또한 만총(滿寵)과 함께 한진(漢津)에서 관우(關羽)를 치고, 조인과 함께 강릉(江陵)에서 주유(周瑜)를 쳤다. >---- >「서황전」 적벽대전에 참가하지 않고 번성에 주둔하며 기타 세력을 평정하던 서황과 당양에 주둔하던 만총이 한진에서 관우를 상대로 승리한 기록이 있는데 위에서 언급한대로 조인의 후미를 끊으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비와 주유는 강릉에서 조인을 포위하여 공격하고 따로 관우를 보내 북쪽길을 끊어 놓았다. 이통은 부대를 인솔하여 관우를 공격하고 말에서 내려 방책을 걷어내고 포위권으로 진입하여 싸우면서 앞으로 나가 조인의 군사를 구출했는데, 무용이 여러 장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 >「이통전」 이통전에도 관우가 조인의 후미를 끊으려 했으나 이통이 관우를 공격하여 포위를 풀어 조인의 군사를 구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14년(209년), 주유와 조인이 서로 대치한 지 1년이 넘어,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조인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 >「오주전」 >이때 또한 질역(疾疫-역병)이 돌아 북군(北軍-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자, 조공이 군을 이끌고 되돌아갔다. > >선주는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고 또한 남쪽으로 4군(四郡)을 정벌했다. 무릉(武陵)태수 김선(金旋), 장사(長沙)태수 한현(韓玄), 계양(桂陽)태수 조범(趙範), 영릉(零陵)태수 유도(劉度)가 모두 항복했다. >---- >「선주전」 강릉의 공성은 1년 넘게 진행되었다. 전황이 불리하고 심지어 역병까지 돌자 결국 조인은 강릉을 포기하고 북쪽으로 물러난다. 한편 유비는 형남 4군을 정벌했는데, 남군에서 주유와 조인이 대치 중일 때 일인지 조인이 물러난 후에 일어난 일인지 명확한 시점은 명확하지 않다. 무제기에는 208년 12월(적벽대전)과 209년 3월 사이에 일어난 일로 나오나, 적벽 이전에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다고 나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건의 순서가 뒤죽박죽이며 오주전의 묘사와 달리 고작 4개월 만에 유비가 형주와 남군의 여러 군을 차지했다고 나오기 때문에 신뢰하기 어렵다. 일단 선주전에는 조조군이 물러난 뒤에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고 형남 4군을 정벌한 것으로 나온다. 조인이 강릉을 포기하고 돌아가자 주유는 강릉을 점령했고 유비가 형남 4군을 정벌하면서 강릉 이남의 형주 땅은 손권-유비 연합군의 소유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